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처인성 전투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232년 8월. [[몽골 제국]]의 대대적인 2차 침략이 시작되었다. [[살리타이]]가 이끄는 몽골군은 [[서경(고려)|서경]]을 [[홍복원]]의 도움으로 무난히 함락시킨 후 같은 해 10월, [[개경]]에 도달하게 된다. 하지만 이미 [[고종(고려)|고종]]은 정부를 [[강화도]]로 이전한 상황. [[살리타이]]는 [[강화도]]를 건너서 공격할까를 고민하다[* 이때 포로로 잡힌 태주(현재의 [[평안북도]] [[태천군]])사람이었던 변여를 고문해서 해로를 알려고 했지만, 그는 끝내 모른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사망했다.] 결국 배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[[고려]] 전체를 불태워 버려 고려 정부, 아니 고려 왕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. 1,000여 명의 별동대가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빠른 속도로 남하를 진행하고 있었고[* 이때 [[충청도]]와 [[대구광역시]]를 지나 [[부인사]]를 불태워 버렸고 그때 [[초조대장경]]이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. 이때 대구에서도 [[승려]]와 일반 백성들이 결사 항전했으나 패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.] [[살리타이]]가 이끄는 직할군인 제4군은 수갈래로 나뉘어 남진을 진행했다. 그해 11월 한양산성을 점령하고 [[경기도]] [[광주시|광주]]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광주성을 공격했지만, 목사 이세화를 필두로 결의를 다지던 광주성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. 결국 살리타이는 [[귀주성 전투|귀주성에서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]] 결국 공격을 포기하고 우회하게 된다. 그리고 그는 주력 병력을 강화 쪽으로 돌리고 직접 지휘하는 일부 병력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현재의 용인이었다. [[구성동(용인)|구성동]]에 위치했던 용구현성(龍駒縣城)을 무혈입성하여 함락시킨 후 제4군의 주력을 [[용인시|용인]] → [[수원시|수원]] → [[군포시|군포]] → 부평 → [[김포]]를 경유해서 [[강화도]]의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게 하고 본인의 일부 병력으로 남하를 계속했다. 그리고 그곳에 둘레 425m[*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250m 가량이다.]도 안 되는 작은 [[토성(동음이의어)#s-2|토성]](土城)인 처인성(處仁城)을 마주하게 된다. 얼마나 작은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100명 정도가 물자를 가지고 들어갔을 때 꽉 차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